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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캐논으로 발매되는 에피소드 6~7 사이의 내용을 다룬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쪽 설정은 모르고 쓰는 소설이니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1~7까지의 영화와 우키피디아에서 검색한 설정 정도를 참고해 쓰는 소설이기에 기타 매체에서 공개된 캐논 설정과 어긋난 부분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Notes:

워닝 태그나 수위, 등장 캐릭터 등은 향후 스토리 진행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이 점 유의하고 읽어주세요.
오만가지 캐붕이 숨쉬듯 터져 나오는 소설이니 캐붕에 민감하시다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Chapter 1: 기억

Chapter Text

1. 기억

 

꿈은 바다로 둘러싸인 어떤 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꿈속에서의 나는 한 남자와 함께 있는데, 그는 흰옷을 입고 옷 위에는 갈색 로브를 걸쳤다. 그 남자는 내 손을 잡아 이끌고 섬 곳곳을 돌아다니며 나에게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방법이며 섬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 포스와 소통하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때로는 나무 막대기를 들고 그것을 올바르게 잡아 휘두르는 법을 배우기도 했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땀이 온몸에 흥건해질 때까지 뛰어다니기도 했고, 나에게는 조금 높은 암벽을 맨손으로 오르기도 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즐거웠고 행복했으며 끝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언제나 사려 깊고 친절했으며, 항상 나를 볼 때면 웃고 있었다. 그는 종종 나를 들어 올려 꼭 끌어안아 주었고 내가 때로는 이유 없이 변덕을 부리거나 짜증을 내도 화내지 않았다. 그는 내 꿈속의 모든 것이었다.

꿈의 장면이 바뀐다. 더는 그가 나오지 않는 꿈이다. 그가 나오지 않는 꿈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항상 거기서 깨어난다. 꿈을 꾸고 있을 때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채면 꿈속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꿈을 거칠게 흔들고, 뒤집어엎어 버리고, 나를 속이고 농락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빠져나온다. 항상 그렇듯이 눈을 뜨면 흰 천장이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나고 있고,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면 온 세상은 검은색이었다. 아니, 오늘은 그렇게 검지만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창가로 다가갔다. 검은 하늘 속은 수없이 많은 별로 빛나고 있었고, 나는 그 별들에 매혹되어 온 하늘을 샅샅이 살펴보겠다는 생각에 창문에 코를 박고 저 끝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별 무리를 들여다보았다. 온갖 모습을 한 별 무리를 보며 나는 저들이 아름답다고, 또 저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의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눈앞이 빙그르르 도는 듯했다. 그리고 지독하게 목이 말랐다.

 

이리 오지 않으련.

 

나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물컵 속의 물에 말을 걸었다. 물에 존재하는 포스는 내 말에 반응해 나에게 다가와 내 입속으로 들어갔다. 물은 말라 있던 내 입과 목구멍을 적셨고 온몸에 청량감을 주었다. 나는 기꺼이 내 몸의 일부가 되어준 물에 감사를 표했고,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다시 바다에 둘러싸인 섬을 보기 시작했다.

 

*

 

“잘 잤어?”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는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 바로 옆에는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여자의 이마를 가만히 쓸었다.

 

“꾸고 있던 꿈이 마음에 들었나 보네. 오늘도 그 꿈인 걸 보면 말이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이젠 꿈꾸는 것을 멈춰야 할 시간이야. 그 대신 나랑 맛있는 아침 식사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 남자가 내민 손을 잡고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고 방에서 나와 아무것도 없는 긴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끝에는 커다란 방이 있었고, 방의 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담한 크기의 4인용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듯 김을 내뿜고 있는 음식들이 아기자기한 식기들과 함께 먹음직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화려하게 조각된 나무 의자를 빼 그녀를 앉게 했고 그 자신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제일 먼저 흰 빵을 덥석 집어 들었고 크게 입을 벌려 베어 물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라면 꽤 무례할 식사 방식이었지만 그는 그 모습이 귀여운지 샐러드를 접시에 조금 덜다 말고는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맛있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쥐고 있는 빵에만 온 정신을 집중한 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듯한 표정으로 입속에 든 빵을 씹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새끼 새를 바라보는 어미 새의 표정으로 계속해서 그녀에게 격려하는 눈빛을 보냈고, 그녀는 의도적인 듯하면서도 의도하지 않은 듯 그 시선을 외면했다. 하지만 남자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는 아예 그녀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 앉아 접시에 달걀과 베이컨을 가득 옮겨 담아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주었다. 손에 든 빵을 해치운 그녀는 그가 쥐여준 숟가락으로 달걀과 베이컨을 떠먹었고 이윽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잘 먹었어 벤. 오늘도 맛있네.”
“맛있었다니 다행이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모양새로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다 벤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러다 그녀는 벤과 눈이 마주쳤고, 황급히 벤의 발치로 시선을 떨구며 애꿎은 옷자락만 매만졌다.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변했고, 그것을 눈치챈 벤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때마침 식탁 위에 있던 빨간 사과를 가리키며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재빨리 사과를 낚아채 잔뜩 약이 오른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우적우적 씹었다.

 

“레이, 그렇게나 내가 좋아?”
“입안에 있는 사과 조각 다 뱉어버리기 전에 닥쳐.”

 

듣기에는 사과 씹는 소리로 가득한 불분명한 발음의 웅얼거림이었지만 벤은 정확하게 그 말뜻을 이해하고는 레이의 뜻을 ‘존중’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레이는 갑작스럽게 ‘안김을 당한 것’에 항의하여 벤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퍽 내려쳤고, 그는 애교로는 봐주기 힘든 주먹질을 조금 아프다는 표정으로 받아냈다. 레이는 그렇게 주먹질을 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양 씩씩거리다 벤의 정강이에 발길질하는 시늉까지 하고 나서야 겨우 그에게서 떨어졌다.

 

“워워. 거 참 고작 농담 좀 한 것 갖고 그렇게 반응할 것까지야.”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진짜로 좋아하는 거 아니냐라는 식으로 말했으면 당신 정강이가 아니라 거시기를 정확하게 까줄 생각이었는데, 뭐 학습능력은 있나 보네.”
“입방정 떨다 매를 번다는 건 소위 친부라는 인간으로부터 확실하게 습득한 지식 중 하나지. 그나저나 우리 아침 식사도 했으니 정원에 나가보는 건 어때? 어제 심어둔 씨앗에 무슨 일이 생겼을지 궁금하지 않아?”

 

벤은 레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의 손은 허공에서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을 지나쳐 곧바로 정원으로 향했다. 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 걸까. 너는 가까워졌다고 생각할수록 더욱더 멀어진다.

 

*

 

간밤에 내린 비 덕분인지 행성의 토양이 비옥해서인지는 몰라도 새끼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작은 새싹들이 흙 위로 솟아 올라와 있었다. 한 번도 그런 작은 새싹을 본 적이 없는 레이는 흙 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새싹에 가까이 들이밀고, 혹시나 건드려서 새싹이 다칠새라 조심하며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저기 있잖아. 벤.”

 

레이는 새싹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응?”
“이 새싹이 자라면 꽃이 피는 거지?”
“내가 심은 씨앗이 꽃의 씨앗이라면 꽃이 피겠지. 무사히 자란다면 꽃이 필 테고 날이 너무 가물어서 물을 못 먹거나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꽃이 피기도 전에 죽겠지.”

 

레이는 별 감흥은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치지도 않는 듯 한참 동안 엎드린 자세 그대로 새싹을 들여다보았다. 벤이 레이가 엎드린 그 맞은 편에 누워 레이의 눈을 똑바로 바로볼 때까지는.

 

“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야.”
“내가 꼭 그거에 대해 대답을 해야 하니?”

 

레이는 그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방 먹였다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의 유치해 빠진 얼간이를 뒤로하고 ‘집’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벤은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레이는 평소 두 사람이 산책하고 돌아오는 기준으로 삼던 오래된 거목을 지나쳐 저 지평선 너머를 향해, 누군가가 그녀를 막으려 쫓아오는 양 필사적으로 달렸다. 레이도, 그녀를 쫓던 벤도 모두 서서히 지쳐서 숨을 헐떡거릴 즈음 지평선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표면을 뒤덮은 초록색과 저 지평선 끝에 펼쳐진 또 다른 붉은색은...

 

“레이!”

 

멀지 않은 곳에서 따라오던 벤은 재빨리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그의 눈앞에 죽은 지 꽤 오래되어 퉁퉁 불은 온갖 종류의 사체들이 본래 빛깔을 알 길이 없는 바다 위를 헤매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레이.”

 

그녀는 벤의 품 안에서 경련하듯 몸을 떨며 숨을 몰아쉬었다. 벤은 그대로 레이를 안아 들고 바다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곳까지 가 풀밭 위에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았다. 레이의 뺨 위는 눈물이 흘러내린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저기, 저 끔찍하게 구역질 나는 곳은 대체 뭐야.”
“저게 이 행성의 바다야. 넓고 빨갛고… 그 보통의 푸른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도 다들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그… 그것들만 없었더라면 예뻤을지도 몰라.”

 

벤은 횡설수설하면서 머리를 쥐어뜯다가 풀밭 위에 쓰러진 그녀를 일으켜서 그대로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레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떼어내려 했지만 벤은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더 단단히 힘을 주어 그녀를 품 안에 가뒀다.

 

“미안해. 뭐라 할 말이 없지만 정말 미안해.”

 

레이는 옷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가슴골에 코가 박힌 채로 조용히 심호흡했다. 그리고 그녀가 본 끔찍한 풍경들을 당장은 머리에서 지워버리면서도, 그것들을 머릿속 깊은 곳으로 정리했다. 당장은 이 남자 앞에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풍경이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풍경이었다. 그것에 대해 곱씹는 것은 그녀가 이 행성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할 수 있는 그녀의 작은 방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간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아무리 전투에서 수없이 봐왔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을 대충은 정리한 레이는, 손으로 어깨뼈를 만지작거리는 동시에 점점 팔에 더 힘을 주어 그녀를 숫제 내리눌러 압박하다시피 하는 코앞의 남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저기 있잖아. 벤, 엄청나게 미안한 건 잘 알겠는데 나 숨 막혀.”

 

그는 고개를 내려 품 안의 레이가 ‘당장 나를 풀어주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것이다’라는 눈짓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뜻대로 해주지 않는다면 정강이를 걷어차이는 그 이상의 응징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제쳐놓고라도 레이의 얼굴은 너무 꽉 끌어안은 탓인지 핏기가 싹 가셔 창백했다. 그는 바로 팔에 힘을 풀었고 레이는 잽싸게 품 안을 빠져나와 풀밭에 벌렁 드러누웠다.

 

“세상에 미안하다면서 그따위로 무식하게 끌어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진짜 거짓말 안 보태고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
“아니 난 네가 충격을 너무 심하게 받은 것 같길래 안아주는 것이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 솔직히 충격을 좀 받기는 했다만 조금 전은 정말 몸에 눌려서 질식할 뻔했어. 안정? 안정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안정이라지.”

 

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레이와 조금 떨어진 옆에 말 그대로 철퍼덕 소리가 나게 앉았다. 레이는 옆에 썩은 생선이라도 던져진 마냥 질색하며 그대로 몸을 굴려 벤으로부터 등을 지고 누웠다. 그의 얼굴은 당황한 나머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레이를 향해 뻗은 손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허공만 휘저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르고, 정적을 깬 것은 레이였다.

 

“그래서 오늘 점심은 뭐 먹을 거야.”
“어어?”
“점심 메뉴 말이야. 뭐 해줄 거냐고.”

 

레이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였다. 벤은 어린 시절 그의 부모가 자주 이런 식의 대화를 했음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만족할만한 대답을 하면 얼마든지 화를 풀 생각이 있으니 똑바로 처신해봐라 라는 무언의 압박이 깔린 대화. 항상 이런 대화를 시작하는 건 어머니였고 이 시험을 노련하게 헤쳐나 가는 건 아버지였다. 그 무뢰한에게도 나름대로 배울 것은 있었다는 사실에 그는 새삼 놀라워하며 곰곰이 어제 저녁 식사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가를 회상해 보았다.

 

“어제 먹고 싶다고 했던 것이 코렐리아식 스튜라고 했지 아마?”

 

레이는 제법이라는 표정으로 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다시 한 번 레이를 향해 다가가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내민 손이 무안하게 스스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니 대체 왜 그렇게 손잡는 걸 좋아해? 아침에 비몽사몽 한 틈에 이마 만지작거리고 에스코트한답시고 손잡는 것까지는 그냥 봐줬는데 아주 하나 봐주니까 오만 가지 일로 손잡아주려고 하네? 내 힘으로도 충분히 혼자 일어날 수 있어. 내가 뭐 그렇게 연약해 보여? 그냥 톡 건드리면 부서지게 생겼어?”

 

벤은 그냥 덤덤히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 벤이 내민 손을 잡고 집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레이는 벤의 손을 일부러 꽉 잡아 비틀었고, 그는 속으로 신음하며 그녀의 손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

 

아침 산책에서 돌아온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산책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레이는 먹고 싶어 하던 코렐리아식 스튜를 점심으로 먹을 수 있었고, 식기 사용이 서투르기 때문에 아침과 마찬가지로 포크와 나이프를 써야 하는 부분은 벤의 도움을 받았다. 벤은 기꺼이 스튜에 들어간 고기 조각을 잘게 잘라 레이의 접시에 양껏 퍼 담아 주었고, 점심은 정말이지 어떤 우발적 사건도 없이 조용히 흘러갔다. 식사를 마치고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벽난로 앞 소파에 자리를 잡았고 각자 원하는 간식을 옆에 끼고 책을 읽었다. 둘은 냉전 중인 연인처럼 서로에게 한마디도 걸지 않았고 그저 자기가 집어온 책만 페이지가 뚫어질 기세로 탐독했다. 이따금 과자 부스러지는 소리와 페이지 넘기는 소리, 글자와 사이가 나쁜 레이가 내는 하품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벤이 가져온 책을 거의 반쯤 읽고 소설 속의 두 연인이 아무 관계적 진척도 없이 서로 감정소모만 하는 장면에 질려 고개를 돌렸을 때 레이는 이미 곤히 잠들어 있었다. 벤은 책을 가만히 덮어두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손을 가만히 레이의 눈앞에서 흔들다가 아주 작은 소리로 손뼉을 쳤고, 그가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 나왔다. 평소라면 그 작은 행동에도 놀라서 벌떡 일어났을 그녀가 눈꺼풀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채 소파에서 자는 것이 불편한 듯 뒤척일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웃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가만히 쓸다 그대로 품에 안아 들고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눕혀지면서도 세상 모르게 자는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조금 더 욕심을 내서 그녀가 깨어 있었다면 한 대 맞는 걸로 끝나지 않을 행동을 하기로 하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춰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내리눌렀다 뗐다. 이마에 그만이 알 수 있는 아주 희미한 흔적이 남은 것을 보자 그의 얼굴에는 엷게 미소가 번지다 사라졌다.

 

“이렇게나 잘 잠들 줄은 몰랐는데.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네가…”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고, 그녀가 혹시나 깰세라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문을 닫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